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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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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릴랜드브니엘교회March 24, 2024 [2024.03.24] 브니엘 칼럼 | 영적 자유함 (Spiritual Freedom)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마가복음 11장 2절)      드디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특이한 점은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다는 점입니다. 왕이나 개선 장군이 타던 ‘잘 생기고 건장한 말’이 아닌, 초라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메시아/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한 말씀들을 그대로 성취하고 계십니다. 특히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몸소 이루셨습니다.        ‘새끼 나귀’에 담긴 의미는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함, 낮아짐, 섬김’에 대한 깊은 뜻입니다. 하늘에 높이 계셔야 할 하나님의 아들께서 왜 이 낮은 땅까지 내려오셨습니까? 화려한 왕궁에서 태어나셔도 충분했을 분이, 왜 초라한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까?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생활하셔도 될텐데, 왜 가장 낙후된 갈릴리 나사렛에서 지내셨습니까? 다윗과 솔로몬처럼 왕의 보좌에 앉으셔도 되는데, 왜 끔찍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셔야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몸소 보여주신 ‘신앙의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주님의 이런 겸손함과 섬김의 마음을 진정 깨닫지 못한다면, 그 분의 진정한 팔로워(Follower)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희가 의미를 꼭 되새겨야 할 장면은, 묶여 있던 새끼 나귀를 풀어서 예수님께로 데려오는 장면입니다. 참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이전에 묶여 있던 헛된 것들로부터 자유케 풀려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조선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는 1885년 부활절 아침에 인천 제물포 항구에 도착하여 이런 기도를 올립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 곳에 왔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께서 그동안 이 백성을 얽어 맨 결박을 끊으사, 참 빛과 자유를 주옵소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복음’을 예수를 통해 경험함으로, 그 동안 얽매여 있던 더럽고 악한 것들로부터 풀려나 자유케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 메릴랜드 브니엘교회 윤병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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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
    매릴랜드브니엘교회March 18, 2024 [2024.03.17] 브니엘 칼럼 | 값을 매길 수 없는 은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마가복음 Mark 10:38)    “값 싼 은혜(Cheap Grace)”란 말이 있습니다. 독일에 “본회퍼”라는 목회자가 독재자 “히틀러”에 동조하는 독일교회와 교인들을 향해 일침을 가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Grace)’는 정치 권력이나 물질적 욕망을 뛰어 넘어, 훨씬 더 고결한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는 것인데, 당시 독일 교회와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값싼 은혜(Cheap Grace)’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히틀러의 권력 앞에, 독일 교회가 분별력을 잃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꼭 간직해야 할 고결한 신앙의 가치를 강조하십니다.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나는 삼 일 만에 살아니리라”(34절) 벌써 3번째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곧이어 황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엉뚱한 요구를 합니다.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혀 주옵소서…”(37절)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은 잊어버린 채,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은 욕심이 가득합니다.                 주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신앙의 도전을 주십니다. “너희는 지금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겠느냐?”(38절) 스승의 뜻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제자들은 “할 수 있다”(39절)고 장담하지만, 곧이어 또 다시 치열한 서열 다툼을 계속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반복적으로 남기시는 중요한 메시지는 계속 놓치시면서, 내 욕심을 채우려는 자리는 계속 탐하진 않으십니까? 예수님이 지속적으로 말씀하시는 ‘잔과 세례’의 의미에는 무관심 한 채, 신앙생활을 계속 하진 않으십니까? 신앙의 고결함을 져버리고, 내 욕심을 채우려는 “값싼 은혜”에 빠져 계시진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십자가의 희생과 섬김의 정신, 그리고 목숨으로 대신하신 죄사함의 ‘은혜’를 더욱 온전히 깨달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 메릴랜드 브니엘교회 윤병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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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
    매릴랜드브니엘교회March 10, 2024 [2024.03.10] 브니엘 칼럼 | 먼저 됨의 축복을 지키십시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가복음 Mark 10:31)    “금수저/흙수저”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와 권력을 많이 물려 받을수록 ‘금수저’로 태어나는 것이고, 아무것도 없이 태어날수록 ‘흙수저’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현실은 ‘흙수저가 금수저 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반대의 말씀을 저희에게 선포하십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0:31)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왜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말씀하셨을까요? 부와 권력의 관점에서만 보면 어려운 일일지 몰라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는지…’ 우리는 우선 27절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 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주님이 말씀하셨던 ‘먼저 됨’의 의미는, 세상적 성공에 초점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참신앙을 갖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아 온 부자 청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아직 한 가지 부족함이 있다. 너에게 있는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리고 다시 와서 나를 따르라…”(21절) 이 말씀은 단순히 ‘모든 재산을 팔아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의미 보다는, ‘믿음의 본질적 문제’를 묻고 계십니다. 그동안 신앙생활을 잘 해왔다고 착각했던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전 재산을 내놓을 수 있느냐?’는 질문 앞에, 슬픈 표정으로 떠났습니다(22절). 그가 가졌던 실제 믿음은 ‘아직 돈을 내려놓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모양으로 우리의 실제 믿음이 어떠한지 확인하십니다.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내려놓고, 먼저 됨의 영적 축복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메릴랜드 브니엘교회 윤병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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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
    매릴랜드브니엘교회March 03, 2024 [2024.03.03] 브니엘 칼럼 | 기도의 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9장 29절)    예수님께서는 3명의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올라 가십니다. 예수님 사역의 시작과 끝에는 항상 기도가 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홀로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매우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바로 전 날까지도 밤을 새워 기도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도 부르짖어 기도하셨습니다. 정말 기도가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제자들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눈부시게 흰 광채가 나는 모습으로 변형 되십니다(2-3절). 앞으로 부활하실 예수님의 모습이 어떠하실런지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그 때 기도하지 못하고 계속 졸고 있던 제자들의 눈에, 그 영광스럽게 빛나는 광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머무는 것이 너무 좋사오니, 텐트 3개를 만들어서 주님과 함께 계속 여기 머물고 싶습니다(5절)...”            8장에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여 큰 칭찬을 받았고,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예수님께 크게 혼나는가 하면, 다시 9장에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횡설수설’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치 베드로가 보여준 모습처럼 오르락 내리락 갈팡질팡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제자들은 왜 ‘빛나는 영광’은 계속 누리고 싶으면서, ‘십자가의 사명’은 감당하기 싫어했을까요? 오늘 암송구절 말씀에서도 주님은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능력/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모든 일의 처음과 끝에서 ‘기도’를 한다는 것은, 내가 정말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강력한 신앙의 표현입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신뢰관계 속에서,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줄 믿습니다. 기도가 능력이 될 수 있도록,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 브니엘교회 윤병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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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
    매릴랜드브니엘교회February 26, 2024 [2024.02.25] 브니엘 칼럼 | 희미하지 않은 분명한 믿음으로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마가복음 8:24~25)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는 한국 속담이 있습니다. 농기구인 ‘낫’의 모양이 ‘기역(ㄱ) 자’임에도 불구하고, 낫을 보며 ‘ㄱ’을 못 읽는다는 뜻입니다. 매우 답답하고 무지한 상태를 가리키는 속담입니다. 오늘 마가복음 8장에 나오는 제자들도 스승인 예수님을 너무 답답하게 만듭니다. 방금 전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을 보았음에도,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믿음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바로 옆에 함께 다니면서도, 여전히 매사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제자들의 영적인 무지함을 꽤뚫어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이토록)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마가복음 8:17~18) 심히 꾸짖으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은 교회에 다닌지 오래 되었으나, 아직도 예수님이 진짜 누구신지 깨닫지 못하는 우리를 꾸짖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예수님은 한 맹인의 눈에 안수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나무가 걸어가는 것이 보입니다.” 사람을 보면서 나무가 걷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뚜렷이 보이지 않고 희미하게 보이므로, 사람을 나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가 정말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옆에 모시고 다니면서, 여전히 매순간 염려하며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님과 늘 동행한다고 말은 하지만, 여전히 ‘먹을 것/입을 것’에 대한 세상 걱정으로 가득하지는 않으십니까? 간절히 축원 드리기는, 그동안 희미하여 보이지 않던 주님이, 분명하게 깨달아지는 역사가 나타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번 한 주도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 메릴랜드 브니엘교회 윤병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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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
    매릴랜드브니엘교회February 19, 2024 [2024.02.18] 브니엘 칼럼 | 닫혔던 것들이 열리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마가복음 7장 34절)    ‘듣지 못하며 말을 더듬는 상태…’ 오늘 예수님께로 온 한 사람의 ‘치료 받기 전 상태’였습니다. 사람이 듣지를 못하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청력 장애가 있으신 분들이 대부분 언어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우리의 영적인 상황과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고,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항상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왜 그리 많겠습니까? 평소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들리지 않으면, 말씀을 제대로 전할 수 없는 것이 이치입니다.     이번주 암송구절 말씀에서,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더듬던 한 분이 어떻게 치료 받습니까? 우선 33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행하셨던 첫 번째 방법은, 그 사람을 “따로”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나가셨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일상생활 가운데 “따로”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얼마나 있으십니까? 일상의 분주한 일들에서 잠시 벗어나, 개인적으로 따로 예수님과의 시간을 가지고 계십니까?     마지막으로 34절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중요한 한 단어를 그에게/우리에게 외치십니다! 바로 “에바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꽉 막혀 있던 ‘영적 장애 상태’를 매우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시다가, 우리에게 중요한 한마디를 외치십니다. “에바다/열려라!”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 막혀 있던 귀가 열려야 하고, 그 동안 막혀 있던 입이 열려야 합니다. 영적으로 막혀 있고 닫혀 있던 것들이 예수님 때문에 활짝 열리시는 브니엘교회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번 한 주도 승리하세요!                                                                                  - 메릴랜드 브니엘교회 윤병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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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매릴랜드브니엘교회February 12, 2024 [2024.02.11] 브니엘 칼럼 | 손 잡고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마가복음 5:41)    신앙이 없는 분들은 흔히 ‘죽으면 다 끝난다. 아무 소용 없다’고 생각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것’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영생’을 실제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 마가복음 5장에서도,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 내시겠다고 하니, 장례식에 온 사람들이 다 “비웃었다”고 나옵니다. 예수님의 ‘살리시는 능력, 구원하시는 능력’을 믿지 못하면, 예수를 비웃으며 ‘죽으면 다 끝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여겨지고, 다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을 때… 예수님을 진실로 신뢰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때 ‘반전’의 기적을 경험하는 줄 믿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더 체험하게 되고, 그 분을 더 깊이 만나게 됩니다.     오늘 암송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면서 하셨던 행동’에 좀 더 주목해야 합니다. 41절 말씀을 다시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달리다굼!” 이 말은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살아날 소망이 전혀 없는 상황임에도,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달리다굼! 일어나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정말 놓치지 말아야 할 깨달음은, 주님께서 그저 “일어나라”고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달리다굼! 일어나라!”는 말씀과 더불어, 직접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키셨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혹시 우리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많은 것을 포기하고 주저 앉아 계십니까? 여전히 두려움과 낙심 가운데 눌려 계시지는 않습니까? 바로 그 때, ‘예수님의 피 묻은 오른손’이 여전히 내 손을 붙잡고 계심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달리다굼! 내 손을 붙잡고 일어나라!”는 말씀과 함께, 주님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한 주간도 ‘다시 일으켜 살리시는 예수님’과 함께 승리하시길 축복합니다!                                                                               - 메릴랜드 브니엘교회 윤병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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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
    매릴랜드브니엘교회February 04, 2024 [2024.02.04] 브니엘 칼럼 | 말씀의 생명력을 믿으십니까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마가복음 4장 26절)    찬송가 496장에 보시면, “새벽부터 우리”라는 찬송이 나옵니다. 1절 가사가 이렇습니다. ‘새벽부터 우리 사랑함으로써 저녁까지 씨를 뿌려봅시다’ 원래 이 찬송은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갔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귀환하면서 불렀던 시편의 노래에 곡을 붙인 것입니다. 70년 넘게 포로 잡힌 이민자로 살아오다가, 폐허가 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정말 큰 용기와 도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것을 새롭게 세워 나가기 위한 개척정신으로 무장했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원대한 비젼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폐허가 된 것을 알았으면서도, 기쁨과 소망으로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주 암송구절인 마가복음 4장 26절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켜 “씨를 땅에 뿌리는 것”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미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씨를 뿌리는 것”은 곧 “말씀을 뿌리는 것”과 같다는 것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씨가 뿌려져 땅에 심겨지면, 싹이 나고 결실을 맺듯이(28절), 우리가 ‘말씀’을 뿌리는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면, 하나님께서 그 말씀이 심겨지게 하시고 자라게 하셔서 열매를 맺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 있는 ‘생명의 신비’입니다!    사실 우리는 말씀/복음의 씨를 뿌리면서도 ‘과연 열매가 잘 맺힐까?’ 의심하고 염려할 때가 많습니다. 그 때 앞 선 찬송의 고백처럼,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의 소망을 잃지 않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열심히 씨앗을 뿌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놀라운 생명력’으로 역사하셔서, 각 사람에게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확한 때에 맞춰 햇빛과 물을 공급하시며 자라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이번 한 주도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소원하며, 누군가에게 말씀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메릴랜드 브니엘교회 윤병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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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
    매릴랜드브니엘교회January 28, 2024 [2024.01.28] 브니엘 칼럼 | 두려움 vs 믿음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마가복음 4장 40절)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과 “영적 리더쉽”이란 책으로 잘 알려진 헨리 블랙커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모든 염려를 믿고 맡길 분이 생긴다는 뜻이다.” 여러분께는 정말 모든 염려를 믿고 맡길 분이 생기셨습니까?   마가복음 4장에는 예수님께서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위해서 배를 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도 역시 갈릴리바다 건너편으로 이동하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탑니다. 그런데 그만 그 배가 폭풍을 만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폭풍 가운데도 깊이 잠을 자고 계십니다.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제자들은 이제 곧 죽게 되었다며 예수님을 황급히 깨웁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이렇게 믿음이 없느냐?”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두려움’과 우리의 ‘믿음’을 서로 연결해서 말씀하십니다.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스스로 예수를 잘 믿는다고 확신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여전히 위기 가운데 불안해하며 두려워하는 일이 많지 않으십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 두려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우리가 평소에 ‘입술로 고백하는 말’과 우리의 ‘실제 믿음’ 사이에는 격차가 있을 때가 많습니다. 삶의 위기 가운데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못하고, 여전히 불안과 염려만 내 안에 가득하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꼭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그럴 때일수록 더욱 주님을 신뢰하며 붙드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신데도 두려워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실제로는 믿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정확한 타이밍에 우리를 건져내실 줄 믿습니다. 이번 한 주도 두려워하시기 보다는 신뢰하며, 주님의 역사를 경험하시는 한 주간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 메릴랜드 브니엘교회 윤병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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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릴랜드브니엘교회January 23, 2024 [2024.01.21] 브니엘 칼럼 | 2024년 새 해, 기도시간을 꼭 확보하십시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사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마가복음 Mark 1 : 35)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과 1:1로 기도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도 그 바쁜 일정을 소화하시면서도, 꼭 빠뜨리지 않았던 것이 기도셨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저희들도 바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몸과 마음이 분주합니다. 하지만 바쁜 일상에도 불구하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과 1:1로 만나는 것은 너무나 소중한 일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은 정말로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40년 간 사막을 헤맬 때에도, 출애굽의 리더 모세는 매일 회막(Tent of Meeting)에 나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간 신분으로, 총리의 자리까지 오른 다니엘 역시, 바쁜 일정 속에서도 하루에 3번씩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시대마다 지역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은 매우 공통적으로 기도의 습관을 가집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바쁜 일상생활 속에도,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이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본래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야 내가 지금 해야 할 현재의 사명이 무엇인지 올바로 분별할 수 있고, 그 사명을 향해 매순간 전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매일 정해진 시간에 1:1로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는 습관을 지켜 나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4년 한 해도 주님과 함께 승리하세요!                                                                          - 메릴랜드 브니엘교회 윤병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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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릴랜드브니엘교회January 18, 2024 [2024.01.07] 브니엘 칼럼 | 2024년 새 해, 기도시간을 꼭 확보하십시요!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마가복음 1장 35절)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들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 주요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과 1:1로 기도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도 그 바쁜 일정을 소화하시면서도, 꼭 빠뜨리지 않았던 일이 있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저희들도 바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몸과 마음이 분주합니다. 하지만 바쁜 일상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과 1:1로 만나는 것이 너무나 소중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은 정말로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40년 간 사막을 헤맬 때에도, 출애굽의 리더 모세는 매일 회막(Tent of Meeting)에 나가 하나님과 기도하는 시간을 꼭 가졌습니다.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간 신분으로, 총리의 자리까지 오른 다니엘 역시, 바쁜 일정 속에서도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시대마다 지역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기도의 습관을 가집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바쁜 생활 속에서도, ‘크리스찬이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이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본래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야 내가 지금 해야 할 현재의 사명이 무엇인지 올바로 분별할 수 있고, 그 사명을 향해 매순간 전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매일 정해진 시간에 1:1로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는 습관을 잊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4년 한 해도 주님과 함께 승리하세요!                                                                       - 메릴랜드 브니엘교회 윤병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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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릴랜드브니엘교회January 03, 2024 [2023.12.31] 브니엘 칼럼 | 감 사 – 형통한 삶의 비결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편 107:9)   많은 사람들이 시편 107편을 묵상하면서 9절 말씀에 큰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 그런데 이 소중한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신 뜻대로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는, 107편 말씀이 시작되는 1절 말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의 의미를 먼저 이해하셔야 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 말씀을 통해 먼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감사’가 회복되어야만 9절의 위로의 말씀을 더욱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막연히 ‘하나님께 감사해야지…’ 정도가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크리스찬들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올바른 태도는, 감사할 만한 조건이 있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닌, ‘내게 일어난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조건 없는 감사’를 올려 드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조건 없이’ 모든 일에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하고 계십니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으심’을 고백하고 계십니까?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조건부 감사’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면, 나는 여전히 ‘내 필요를 채우는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오늘 시편 107편 말씀을 통해,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변함이 없으시며, 앞으로도 영원하심을 깊이 깨닫고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 메릴랜드 브니엘교회 윤병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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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릴랜드브니엘교회December 27, 2023 [2023.12.24] 브니엘 칼럼 | 감사 - 형통한 삶의 비결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편 107:9)   많은 사람들이 시편 107편을 묵상하면서 9절 말씀에 큰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 그런데 이 소중한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신 뜻대로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는, 107편 말씀이 시작되는 1절 말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의 의미를 먼저 이해하셔야 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 말씀을 통해 먼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감사’가 회복되어야만 9절의 위로의 말씀을 더욱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막연히 ‘하나님께 감사해야지…’ 정도가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크리스찬들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올바른 태도는, 감사할 만한 조건이 있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닌, ‘내게 일어난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조건 없는 감사’를 올려 드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조건 없이’ 모든 일에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하고 계십니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으심’을 고백하고 계십니까?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조건부 감사’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면, 나는 여전히 ‘내 필요를 채우는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오늘 시편 107편 말씀을 통해,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변함이 없으시며, 앞으로도 영원하심을 깊이 깨닫고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 메릴랜드 브니엘교회 윤병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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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릴랜드브니엘교회December 20, 2023 [20231217] 브니엘 칼럼 | 우리의 입술엔 찬양이, 우리의 손에는 말씀이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시편 149:6)   구약성경 시편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시’들이 유독 많이 등장합니다. 실제로 시편을 마무리하는146-150편의 내용이 그렇습니다. 길고 길었던 ‘시편 (Psalms - Poem Collection)’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들은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편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 하루의 삶도, 또 그 하루 하루가 켜켜이 쌓인 우리의 인생 마저도… 그 목적과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드리는 삶입니다.     이번주 암송구절인 ‘시편 149편 6절’에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시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머리 속에 그려보면, 사람들이 손에 칼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마치 큰 전쟁에서 승리한 군사들이 환희의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또 다른 중요한 묵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과 연동하여 더욱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움직이시며… 좌우의 날 선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히 4:12)” 그렇습니다. 시편 말씀과 히브리서 말씀을 연결해서 묵상해보면,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양날의 칼(시 149:6)’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히 4:12)’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합해보면, 크리스찬의 삶 속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면, 바로 우리 입에서 늘 흘러 나와야 할 찬양,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시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의 손엔 예리한 말씀의 검을 들고, 우리의 입술엔 찬양이 끊이지 않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메릴랜드 브니엘교회 윤병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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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릴랜드브니엘교회December 11, 2023 [2023.12.10] 브니엘 칼럼 | 성령의 감동을 받으라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베드로후서 1장 20-21절)   베드로전서와는 다르게, 베드로후서는 아마도 사도 베드로가 곧 죽을 것을 스스로 예감하고 마지막으로 썼던 편지로 보입니다. 마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본인이 선교했던 공동체에 편지형식으로 보낸 것입니다.       이런 유언장과도 같은 베드로후서가 시작되면서, 그가 처음부터 계속 강조하는 포인트는 바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아는 것(1장 2절)”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당시 기승을 부리던 ‘유사 기독교 / 즉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미혹되는 교인들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유사 기독교 /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은 항상 어디로 귀결됩니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구하는 것이 아닌, 특정 사람의 유익 / 또는 세상의 정욕을 교묘히 따라갑니다. 그래서 곧 죽음을 앞둔 베드로는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고, 잘못된 가르침 / 세상 정욕에 유혹되는 많은 사람들을 향해 마지막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20-21절에서 그는 거짓 선생에 미혹되지 않을 아주 중요한 팁을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제발 성경을 사사로이 (자기 필요와 의도대로) 해석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자세를 알려줍니다.        성경은 (비록 사람이 썼다 할지라도)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그 뜻을 해석할 때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 묵상하고 풀어내야 합니다. 자기자신의 필요와 의도가 아닌,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을 치열하게 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 메릴랜드 브니엘교회 윤병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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